치유에 대한 칼빈주의 입장(1) by 최 홍석 교수
치유에 대한 칼빈주의 입장(1) by 최 홍석 교수
자료출처 http://hendersonny.org/board/zboard.php?id=board101&no=9
가끔 우리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말들을 듣습니다. 칼빈주의를 집대성한 칼빈은 성령론이 약하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을 하시는 분들의 신학노선은 오순절 계통에 몸을 담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사실 오순절계통에 속한 사람들이 보면 성령의 은사론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말하고 있고, 또한 나오는 대부분의 책들이 그런 종류의 것임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칼빈주의는 적어도 오순절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솔직히 시인합니다. 허락되면 그런 방면에 더 많은 연구가 있었으면 하고,너무 심하게 오순절계통의 교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감정적인 응수를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에 대한 관심이나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칼빈주의는 소홀히 하고 있느냐?라고 물어본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성령론에 대하여 많은 것을 정립해놓고 있는 상태이고,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절대불변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너무 많은 현상들을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나쁜 습성을 갖고 있는 것이 저희들입니다.
혹시 실수를 하는 것은 아닌가?하고 몸을 사르는 것이 저의들의 입장입니다.
또한 체험에 근거하여 말하는 것을 스스로 자제하려고 하는 것이 저희들의 전통입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칼빈주의 신학의 성경해석을 보면
성경이 가는데까지만 가고, 성경이 침묵하면 침묵하고, 성경이 멈추면 멈춰야 하는
철두 철미한 성경 근거에 말만을 하라고 못을 박아놓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칼빈를 사랑합니다.
성경의 눈을 떠주게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오순절 신학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또한 그런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심어주고 싶은 의도도 눈꼽만치 가지고 있지를 않습니다.
단지 너무 자세한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할 뿐입니다.
이런 주제들을 너무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마음을 먹을 뿐입니다.
이러다가 말씀을 놓쳐버리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부흥회의 성도들이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이유에서 이런 말을 할 뿐입니다.
형평성을 잃어버린 편식된 신학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모자란 걱정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신학은 어떤가?
좋은 말만 하려고 합니다.
참으로 잘 조화된, 형평성을 유지하는 신학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 절대로 아닙니다.
지금까지 나와있는 모든 조직신학책을 한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루이스 벌코프, 쉐드, 웨인그루뎀, 찰스하지, 뎁니, 튜레튼, 칼빈,바빙크등의 책을 보기만 하면 금새 증명이 될 것입니다.
조직신학의 일곱가지 주제에서 성령론이 차지하는 비율이 다른 어떤 것에 비해서 더 부피가 큰 것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개혁주의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에드윈 팔마의 "성령"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성령과 창조, 성령과 섭리, 성령과 은사, 성령과 기도, 성령과 교회, 성령과 중생, 성령과 선교 그리고 전도, 성령과 구원등을 얼마라 잘 다루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면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성령론이 약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과
오웨은 너무 방대한 성령론때문에 그 누구도 그 책을 다 섭렵하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다루고 놓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브라함 카이퍼는 칼빈주의 3대 신학자 중에 하나라는 명성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자랑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여러가지 신학계통의 사람들로 부터 "평균을 유지한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고백서"라는 칭찬을 많이 듣습니다.
말을 길게 할 것 없이
"치유와 방언"은 현대에서 가장 많이 떠오르는 주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현상학적으로 다룰 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나타나기에 사실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고, 또한 나타난 것이 꼭 성경적이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다른 종교에도 있습니다.
치유는 다른 종교에서는 핵심처럼 실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칼빈주의는 이런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루고 싶은 것이지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이 말은 바빙크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다룰 때에 증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최 홍석 교수의 "신학과 삶" p121-125참조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실수를 잘합니다.
학문적으로 미숙합니다.
독자들을 위해서 나의 글을 전개하는 것보다는
나와 신학사상을 같이하고
독자들이 이 정도를 아는 것은 좋겠다고 생각하는 아주 쉬운 분의 글을 인용 정리해서 싣는 것이 유익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총신대학교의 교수이고
너무 이론적이지 않는 최 홍석 교수의 글인 "신학과 삶"은 이런 목적에 부응한다고
생각을 해서 여기에 실어봅니다.
이 글은 전문을 실은 것이 아니기에 100% 저자의 생각이 아닙니다.
편집하는 중에 본 저자의 의도를 곡해했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저의 잘못이고 뉴욕땅에 조금의 유익이라고 주고자 하는 충성심에서 나온 행위이니 독자들의 많은 긍휼를 부탁드립니다.
치유에 대한 신학적 이해
--귀신 들림과 관련하여--
1. 서론
질병이란 여러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종교윤리적인 면에서, 심리학적인 면에서, 유전적 측면에서,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생리 심리학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경륜적 측면 혹은 생태 윤리학적 측면등 다양한 국면과 연결되어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 신학적인 면에서만 다루고자 한다.
귀신들림과 치유의 문제를 둘러싸고 교회나 혹은 믿는 자들의 태도는 양극적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들 정리해보면
(1) 사단과 귀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2) 귀신은 존재하며 인간의 모든 일에 일일이 간섭한다.
(3) 귀신의 존재여부와 예수님의 행하신 교훈과의 내용과는 본질적으로 무관하다.
이 세가지 의견들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우리는 왜 이런 관점들이 생겼는지를 약관하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2 폐쇄적 세계관
세계관은 개방적 세계관과 폐쇄적 세계관으로 분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이 역사안에 개입할 수 있다는 사상은 개방적 세계관이고,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 폐쇄적 세계관이다.
플라톤은 개방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 따라서 영에 의해서 초월적인 세계와 교통이 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폐쇄적 세계관을 갖고 있으며 오직 지각과 경험과 이성을 통해 알려질 수 있는 물리적 세계외에 다른 실재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중세기에 플라톤의 사상은 점점 사라지고 아리스토텔레승의 세계관이 주를 이루었으며 기독교적인 관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종합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나타나게 되었다.
물질계와 별도로 존재하는 영적실재가 물질계 안으로 개입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악령의 역사나 종교적인 치유는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시기에 종교적인 치유는 로마 중세교회의 계속적인 관심 거리였으며 이렇게 볼 때에 아리스토 텔레스의 머리와 플라톤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사상은 논리학이나 형이상학에 있어서 누구의 관점을 따랐느냐?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반으로 출발를 하였다. 17세기의 합리론자 데카르트를 거쳐, 18세기의 영국의 자연신론 ( 또는 이신론) , 18세기 말이 계몽주의는 폐쇄적 세계관을 표명한다.
19세기의 다윈의 진화론은 이러한 배경속에서 꽃을 피운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헤겔의 정반합도 폐쇄적 세계관의 다른 표현이고,
키에르케골를 시작으로 유럽학자들 특히 실존주의 운동을 일으켰던 하이덱거, 야스퍼스, 샤르트르, 마르셀은 실존주의 운동을 일으켰고,현대신학자 바르트, 불트만, 본회퍼, 틸리히등은 철학적인 폐쇄체계가 신학적인 폐쇄체계로 전이된 것에 불과하다.
3. 성경의 증거
성경은 악령의 존재와 그 역사를 부인하는가? 그것은 성경적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사사건건 모든 일들이 악령의 지배하에 있다는 주장은 더욱 문제가 된다.
a. 공관복음서
성경은 사단과 악령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시작을 한다.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사단의 일 가운데 가장 주목할만한 일은 하나님의 구속사역과 그 목적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악령의 영역이나 세력이 이원론적 구조라고 말하지 않고 언제든지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는 일원론적 세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단의 활동을 살펴보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마13:24-30),
예수님으로 하여금 메사야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눅22:3, 눅22:31),
인간 인격를 사로잡는 일
신체적인 질병을 일으키게 하는 일.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병든자나 귀신들린 자 모두를 고치셨다는 막1:32절의 말씀에 주목을 해야 한다.
이것은 분명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병과 귀신들려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현상들을 구분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모든 병이 귀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b. 요한복음
세상은 마귀와 사단으로 일컽어지는 초자연적인 악의 세력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지고 있다.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일에 사단이 그를 조종하였다.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마귀의 자손이라고 하였다.
사람의 인격을 지배하여 하나님의 일을 대항하는 모습들이 많이 그려지고 있다.
c. 바울서신
바울은 선한 영과 악한 영의 모든 존재를 인정한다.
우상들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고전8:4-6) 우상들 속에 귀신이 역사하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어떤 능력이나 그에게 경배하는 것은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고전10:19-21)
세상을 지배하는 신으로(고후4:4), 공중권세 잡은 자로(엡2:2)., 환난과 시험을 통하여 믿는 자들을 방해하며, 진리를 왜곡시키는 일,마지막 때에 불법의 사람으로 나타나 악한 것을 숭배하도록 발악하는 일들이 있다.
d. 요약
(1)성경은 사단과 악령의 존재륻 인정한다.
(2)사단과 하나님은 이원론적 체계가 아니라 일원론적 체계이다.
(3)마귀 및 귀신의 존재와 예수님의 교훈사이에는 본질적인 상관이 있다.
(4)사단의 나라는 관념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4. 구원사적 입장에서 본 악령의 역사
성경의 교훈을 통해서 이 세대와 오는 세대가 중첩되어 있다. 이런 대치 관계에서 일어나는 대립과 긴장이 사회나 문화에서 일어날 수 있고, 개인적인 영역에서 일어날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우상숭배와 비기독교적인 문화의 성행으로 나타난다.
후자의 경우는 영적 긴장과 투쟁으로 경험될 수 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자 하는 것은 후자의 경우이다.
이런 범위에서 사단의 역사를 개괄해보면 다음 세가지이다.
(1)넘어지게 한다.
사단은 처음부터 유혹하는 자로 나타난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넘어지게 하였고,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여 넘어지게 하려고 하였다.
(2) 대적하게 한다.
거짓 선지자 박수 엘루마는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사역을 방해하였다. 방해의 목적은 총독으로 하여금 믿지 목하게 하려는 것이다.
악령의 역사는 복음사역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으로 나타날 수 있다. 진지하게 받아야 할 복음을 마치 실없는 것처럼 인식되도록 하고 있다. 복으이란 어떤 경우에 있어서 악령의 증언을 통해 받아들여지거나 거부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바울은 그러한 악령의 역사가 복음사역에 대한 훼방이라고 판단하였다.
(3) 포로로 만든다.
거라사인의 광인은 귀신에 속박된 대표적인 경우이다. 때로는 귀신들림이 질병의 형태로 위장되기도 한다. 간질병, 벙어리, 소경, 앉은 병이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다.
이런 육신적인 양상과 더불어 영적 현상으로도 나타난다.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다(갈4:3)
우상에게 속박되었다(고전12:2)
현대적인 양상으로는 우상숭배들, 모든 종류의 탐욕, 자아중심적인 이기주의, 배타적인 민족주의, 배금주의, 권력지상주의등은 인간을 사단의 속박에 포로로 만드는 방편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5. 분별
6. 귀신들의 본질
7. 치유
8. 치유의 가능성
9. 평가및 정리
참고서적 : 신학과 삶 최홍석 저 총신대학교 출판부 p93-127
자료출처 http://hendersonny.org/board/zboard.php?id=board101&no=9
가끔 우리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말들을 듣습니다. 칼빈주의를 집대성한 칼빈은 성령론이 약하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을 하시는 분들의 신학노선은 오순절 계통에 몸을 담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사실 오순절계통에 속한 사람들이 보면 성령의 은사론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말하고 있고, 또한 나오는 대부분의 책들이 그런 종류의 것임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칼빈주의는 적어도 오순절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솔직히 시인합니다. 허락되면 그런 방면에 더 많은 연구가 있었으면 하고,너무 심하게 오순절계통의 교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감정적인 응수를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에 대한 관심이나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칼빈주의는 소홀히 하고 있느냐?라고 물어본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성령론에 대하여 많은 것을 정립해놓고 있는 상태이고,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절대불변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너무 많은 현상들을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나쁜 습성을 갖고 있는 것이 저희들입니다.
혹시 실수를 하는 것은 아닌가?하고 몸을 사르는 것이 저의들의 입장입니다.
또한 체험에 근거하여 말하는 것을 스스로 자제하려고 하는 것이 저희들의 전통입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칼빈주의 신학의 성경해석을 보면
성경이 가는데까지만 가고, 성경이 침묵하면 침묵하고, 성경이 멈추면 멈춰야 하는
철두 철미한 성경 근거에 말만을 하라고 못을 박아놓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칼빈를 사랑합니다.
성경의 눈을 떠주게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오순절 신학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또한 그런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심어주고 싶은 의도도 눈꼽만치 가지고 있지를 않습니다.
단지 너무 자세한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할 뿐입니다.
이런 주제들을 너무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마음을 먹을 뿐입니다.
이러다가 말씀을 놓쳐버리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부흥회의 성도들이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이유에서 이런 말을 할 뿐입니다.
형평성을 잃어버린 편식된 신학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모자란 걱정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신학은 어떤가?
좋은 말만 하려고 합니다.
참으로 잘 조화된, 형평성을 유지하는 신학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 절대로 아닙니다.
지금까지 나와있는 모든 조직신학책을 한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루이스 벌코프, 쉐드, 웨인그루뎀, 찰스하지, 뎁니, 튜레튼, 칼빈,바빙크등의 책을 보기만 하면 금새 증명이 될 것입니다.
조직신학의 일곱가지 주제에서 성령론이 차지하는 비율이 다른 어떤 것에 비해서 더 부피가 큰 것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개혁주의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에드윈 팔마의 "성령"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성령과 창조, 성령과 섭리, 성령과 은사, 성령과 기도, 성령과 교회, 성령과 중생, 성령과 선교 그리고 전도, 성령과 구원등을 얼마라 잘 다루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면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성령론이 약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과
오웨은 너무 방대한 성령론때문에 그 누구도 그 책을 다 섭렵하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다루고 놓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브라함 카이퍼는 칼빈주의 3대 신학자 중에 하나라는 명성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자랑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여러가지 신학계통의 사람들로 부터 "평균을 유지한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고백서"라는 칭찬을 많이 듣습니다.
말을 길게 할 것 없이
"치유와 방언"은 현대에서 가장 많이 떠오르는 주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현상학적으로 다룰 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나타나기에 사실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고, 또한 나타난 것이 꼭 성경적이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다른 종교에도 있습니다.
치유는 다른 종교에서는 핵심처럼 실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칼빈주의는 이런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루고 싶은 것이지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이 말은 바빙크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다룰 때에 증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최 홍석 교수의 "신학과 삶" p121-125참조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실수를 잘합니다.
학문적으로 미숙합니다.
독자들을 위해서 나의 글을 전개하는 것보다는
나와 신학사상을 같이하고
독자들이 이 정도를 아는 것은 좋겠다고 생각하는 아주 쉬운 분의 글을 인용 정리해서 싣는 것이 유익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총신대학교의 교수이고
너무 이론적이지 않는 최 홍석 교수의 글인 "신학과 삶"은 이런 목적에 부응한다고
생각을 해서 여기에 실어봅니다.
이 글은 전문을 실은 것이 아니기에 100% 저자의 생각이 아닙니다.
편집하는 중에 본 저자의 의도를 곡해했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저의 잘못이고 뉴욕땅에 조금의 유익이라고 주고자 하는 충성심에서 나온 행위이니 독자들의 많은 긍휼를 부탁드립니다.
치유에 대한 신학적 이해
--귀신 들림과 관련하여--
1. 서론
질병이란 여러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종교윤리적인 면에서, 심리학적인 면에서, 유전적 측면에서,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생리 심리학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경륜적 측면 혹은 생태 윤리학적 측면등 다양한 국면과 연결되어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 신학적인 면에서만 다루고자 한다.
귀신들림과 치유의 문제를 둘러싸고 교회나 혹은 믿는 자들의 태도는 양극적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들 정리해보면
(1) 사단과 귀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2) 귀신은 존재하며 인간의 모든 일에 일일이 간섭한다.
(3) 귀신의 존재여부와 예수님의 행하신 교훈과의 내용과는 본질적으로 무관하다.
이 세가지 의견들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우리는 왜 이런 관점들이 생겼는지를 약관하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2 폐쇄적 세계관
세계관은 개방적 세계관과 폐쇄적 세계관으로 분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이 역사안에 개입할 수 있다는 사상은 개방적 세계관이고,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 폐쇄적 세계관이다.
플라톤은 개방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 따라서 영에 의해서 초월적인 세계와 교통이 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폐쇄적 세계관을 갖고 있으며 오직 지각과 경험과 이성을 통해 알려질 수 있는 물리적 세계외에 다른 실재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중세기에 플라톤의 사상은 점점 사라지고 아리스토텔레승의 세계관이 주를 이루었으며 기독교적인 관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종합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나타나게 되었다.
물질계와 별도로 존재하는 영적실재가 물질계 안으로 개입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악령의 역사나 종교적인 치유는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시기에 종교적인 치유는 로마 중세교회의 계속적인 관심 거리였으며 이렇게 볼 때에 아리스토 텔레스의 머리와 플라톤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사상은 논리학이나 형이상학에 있어서 누구의 관점을 따랐느냐?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반으로 출발를 하였다. 17세기의 합리론자 데카르트를 거쳐, 18세기의 영국의 자연신론 ( 또는 이신론) , 18세기 말이 계몽주의는 폐쇄적 세계관을 표명한다.
19세기의 다윈의 진화론은 이러한 배경속에서 꽃을 피운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헤겔의 정반합도 폐쇄적 세계관의 다른 표현이고,
키에르케골를 시작으로 유럽학자들 특히 실존주의 운동을 일으켰던 하이덱거, 야스퍼스, 샤르트르, 마르셀은 실존주의 운동을 일으켰고,현대신학자 바르트, 불트만, 본회퍼, 틸리히등은 철학적인 폐쇄체계가 신학적인 폐쇄체계로 전이된 것에 불과하다.
3. 성경의 증거
성경은 악령의 존재와 그 역사를 부인하는가? 그것은 성경적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사사건건 모든 일들이 악령의 지배하에 있다는 주장은 더욱 문제가 된다.
a. 공관복음서
성경은 사단과 악령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시작을 한다.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사단의 일 가운데 가장 주목할만한 일은 하나님의 구속사역과 그 목적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악령의 영역이나 세력이 이원론적 구조라고 말하지 않고 언제든지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는 일원론적 세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단의 활동을 살펴보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마13:24-30),
예수님으로 하여금 메사야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눅22:3, 눅22:31),
인간 인격를 사로잡는 일
신체적인 질병을 일으키게 하는 일.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병든자나 귀신들린 자 모두를 고치셨다는 막1:32절의 말씀에 주목을 해야 한다.
이것은 분명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병과 귀신들려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현상들을 구분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모든 병이 귀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b. 요한복음
세상은 마귀와 사단으로 일컽어지는 초자연적인 악의 세력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지고 있다.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일에 사단이 그를 조종하였다.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마귀의 자손이라고 하였다.
사람의 인격을 지배하여 하나님의 일을 대항하는 모습들이 많이 그려지고 있다.
c. 바울서신
바울은 선한 영과 악한 영의 모든 존재를 인정한다.
우상들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고전8:4-6) 우상들 속에 귀신이 역사하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어떤 능력이나 그에게 경배하는 것은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고전10:19-21)
세상을 지배하는 신으로(고후4:4), 공중권세 잡은 자로(엡2:2)., 환난과 시험을 통하여 믿는 자들을 방해하며, 진리를 왜곡시키는 일,마지막 때에 불법의 사람으로 나타나 악한 것을 숭배하도록 발악하는 일들이 있다.
d. 요약
(1)성경은 사단과 악령의 존재륻 인정한다.
(2)사단과 하나님은 이원론적 체계가 아니라 일원론적 체계이다.
(3)마귀 및 귀신의 존재와 예수님의 교훈사이에는 본질적인 상관이 있다.
(4)사단의 나라는 관념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4. 구원사적 입장에서 본 악령의 역사
성경의 교훈을 통해서 이 세대와 오는 세대가 중첩되어 있다. 이런 대치 관계에서 일어나는 대립과 긴장이 사회나 문화에서 일어날 수 있고, 개인적인 영역에서 일어날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우상숭배와 비기독교적인 문화의 성행으로 나타난다.
후자의 경우는 영적 긴장과 투쟁으로 경험될 수 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자 하는 것은 후자의 경우이다.
이런 범위에서 사단의 역사를 개괄해보면 다음 세가지이다.
(1)넘어지게 한다.
사단은 처음부터 유혹하는 자로 나타난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넘어지게 하였고,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여 넘어지게 하려고 하였다.
(2) 대적하게 한다.
거짓 선지자 박수 엘루마는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사역을 방해하였다. 방해의 목적은 총독으로 하여금 믿지 목하게 하려는 것이다.
악령의 역사는 복음사역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으로 나타날 수 있다. 진지하게 받아야 할 복음을 마치 실없는 것처럼 인식되도록 하고 있다. 복으이란 어떤 경우에 있어서 악령의 증언을 통해 받아들여지거나 거부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바울은 그러한 악령의 역사가 복음사역에 대한 훼방이라고 판단하였다.
(3) 포로로 만든다.
거라사인의 광인은 귀신에 속박된 대표적인 경우이다. 때로는 귀신들림이 질병의 형태로 위장되기도 한다. 간질병, 벙어리, 소경, 앉은 병이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다.
이런 육신적인 양상과 더불어 영적 현상으로도 나타난다.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다(갈4:3)
우상에게 속박되었다(고전12:2)
현대적인 양상으로는 우상숭배들, 모든 종류의 탐욕, 자아중심적인 이기주의, 배타적인 민족주의, 배금주의, 권력지상주의등은 인간을 사단의 속박에 포로로 만드는 방편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5. 분별
6. 귀신들의 본질
7. 치유
8. 치유의 가능성
9. 평가및 정리
참고서적 : 신학과 삶 최홍석 저 총신대학교 출판부 p9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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