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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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5) -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성경적인가?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5) -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성경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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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렘31:29-30 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겔18:2-4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한국교회는 아주 최근에 이르기 전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신앙적인 노선을 가지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여러 교파의 사람들이겠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절대다수였던 장로교회를 기준으로 생각해 보자면 장로교회들은 어느 정도는 개혁주의 신앙,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근본적 테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그것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무너짐의 한가운데에는 실용주의를 필두로 한, 마케팅화, 심리화한 교회의 성장주의가 있습니다(부흥과 개혁사의 옥성호 씨의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를 권합니다). 즉,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한국교회의 상황은 “효과가 있다면(사람만 모인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풍토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주도적 교회 중의 한 곳에서 청년들이 나이트 클럽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는 개인적으로 단지 문화적 충격만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현 상황이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현재의 한국교회는 사람을 교회로 데리고 올 수 있다면, 한명 전도하는데 십만원씩 내걸고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교회가 되어 가고 있고(그들은 말합니다. “영혼을 구하는데 돈 십만원이 문제인가!”......하지만 돈 십만원이 아까워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습니까?), 예배시간에 패션쇼를 하면서도 양심을 가책을 받지 않는 교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본 미국교회에서 예배시간을 마치 ‘오프라 윈프리 쇼’처럼 토크 프로그램 진행하듯이 하는 것을 한국교회에서도 볼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최근에는 찬양을 빙자한 댄스욕망을 부추기는 CCD를 넘어서서, 테크노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 대면서 그것을 예배라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교리적 제한선이 없는 교회,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 교회, 말씀을 아무렇게나 갖다 대기만 하는 교회인 현재의 한국교회는 참으로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얼마 전에 기독교 TV에서 ‘베니 힌’이라는 사람이 집회를 하는 장면을 보내주었습니다. 보신 분이 얼마나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이 쓴 책도 기독교 서점에서 버젓이 베스트 셀러가 되어 팔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전형적인 은사주의자, 신비주의자입니다. 한국교회는 최근에 이르기 전까지만 해도 신비주의적 성령운동을 항상 이단으로 경계했습니다. 베니 힌이 집회에서 행하는, 손을 대면 사람이 뒤로 넘어지는 현상은 전형적인 “빈야드 운동”(신 오순절 운동)의 양태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TV에 나오고, 그의 책이 수없이 팔리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번지수입니다. 이런 종류의 소위 자신을 “영적이다”라고 하는, 기독교보다는 영지주의에 더 가까운 신비주의적 신앙이 우리나라에 해일과 같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이런 비성경적인 일탈의 조류들 중에, 최근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는 것으로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는 것이 있습니다. ‘메릴린 히키’라는 여자를 통해 우리나라에 소개된 이 내용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라는 책으로 알려졌습니다. 뒤이어 한국저자(이윤호)를 통해서도 비슷한 종류의 책이 출판되었습니다(『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 그리고 현재는 이와 유사한 책들이 몇 권 더 나와 있는 상태입니다. 이 내용이 공식화되어 책으로 출판된 것은 이런 루트를 통해서이지만, 사실 이 내용이 한국 독자들에게 익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런 책이 출판되기 이전부터 성도들은 이미 이런 이야기를 설교자들을 통해, 간증집회를 통해 많이 들어왔었기 때문입니다.

책의 내용을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을 선정하여 그들의 자손을 조사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을 선정하여 그들의 자손을 조사한 다음 그 후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비교한다.” 메릴린 히키의 경우에는 그의 책에서 “맥스 죽스”라는 불신자가 불신자 여자와 결혼하여 이룬 가문에서 516명이 참으로 비참한 생활을 했으며, 청교도 중 가장 잘 알려진 “조나단 에드워드”의 가문 1,394명을 조사하여 이들이 모두 출세하여 하나님께 복 받은 가문이 되었다고 제시합니다. 히키는 이런 예를 통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문은 천대까지 복을 받고”(출20:6),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는 가문은 삼, 사대까지 저주를 받는다”(출20:5)는 공식을 세웁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실제 이런 내용이 통계화 되어 제시되지 않았다 뿐이지 이미 많은 성도들이 이런 이야기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삽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고, 영향력 있는 한 흐름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성도들과 이야기해 보면, 그들 중 다수가 이런 내용을 믿고 있습니다. 즉, “부모님이 잘 믿으면 자녀들이 복을 받지만, 부모들이 잘못 믿으면 자녀들이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출애굽기 20장 5-6절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영향력 있게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얼마나 주술적이며, 비성경적인 것인지 알고 계십니까? 성경이 과연! 우리에게 나의 믿음이 어떻든지 간에, 나의 조상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나는 저주하에 있다고 가르칩니까? 그래서 그 “숙명적, 운명적 저주”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발버둥을 쳐야만 하는 것입니까? 과연 그런 가르침이 성경의 가르침입니까?
일단, 현실적인 부분에서 반론을 제시해 봅시다.

먼저, 위에서 예를 든 케이스에서 생각해 봅시다. 히키는 자신이 임의로 불신자 중 한 가문과 신자 중 한 가문을 뽑았습니다. 그러나 저것이 모두에게 통용되는 법칙일까요? 아주 간단하게만 생각해 보아도, 주변에 있는 불신가정들 중에 수십 대를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어도 재벌 가문인 케이스가 많이 있습니다. 삼성, 현대, 엘지 등의 회사를 가지고 있는 재벌들과 정계의 총수들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을 보십시오. 대부분이 불신자이지만, 이 사람들은 수 대에 걸쳐 최고의 권력과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연 히키의 예가 일반적입니까? 그녀는 단지 불신자들 중 매우 좋지 못하게 된 한 사람의 가문을 뽑아가지고 와서 일반화시켰을 뿐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불신조상을 가지고도 어마어마한 부와 권세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예들을 생각해 본다면 히키가 제시하고 있는 논지는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이 이런 어이없는 일들을 “믿음”이라는 탈을 쓰고 있기 때문에 용인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는 개념은 무속신앙이나 주술이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이런 무당들에게나 통용될 이야기가 어떻게 기독교 신앙으로 신자들에게 전파되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면 이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고 있을까요?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성경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지지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바로 이 질문에 대해 아주 직접적인 대답을 두 곳에서나 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본문들입니다.
 
예레미야 31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렘31:29)
이 말은 신 포도를 아버지가 먹었는데, 아들이 이가 시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모를까봐 다음 절은 설명까지 달고 있습니다.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30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가게 되었을 때, 그들 중에는 자기 부모들의 죄악 때문에 자기들이 이런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즉, 자신들이 지금 받게 되는 포로의 형벌은 자신들의 죄악이라기보다는 부모로부터 말미암은 저주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지금 이가 시다고 하느냐? 그러면 네가 이가 신 것은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기 때문이냐? 노! 전혀 그렇지 않다! 신 포도를 먹는 그 사람의 이가 시듯이, 사람은 각각 자기 죄악으로만 죽을 것이다!”
하나님의 대답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부모들의 죄악 때문에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이유는 부모들로부터 인한, 자신들은 전혀 모르는, 어쩔 수 없는 운명론적인 저주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 하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에스겔의 본문도 같은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합니다(18:1).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속담에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2절)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비의 영혼도 내게 속했고,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을 것이다” (4절).

에스겔 본문 역시도 우리에게 “다른 이로 말미암아 내가 벌을 받는 경우” 따위는 없다고 가르칩니다. 아버지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아들이 그 대가를 치르는 경우도 없고, 아들의 죄 때문에 아버지가 대가를 치르는 경우도 없습니다. 오직,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을 것”입니다.
 
성경의 이런 말씀을 통해서보면,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는 개념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이에 대해 모호하게 해답을 주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성경은 이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믿어야겠습니까?

사실 이런 “가계에 흐르는 저주”와 같은 사고방식은 신앙적이라기보다 주술적입니다. 사람이 갖고 있는 알지 못하는 두려움을 자극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좋지 못한 일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알지 못하는 나쁜 일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그 이유가 어디 있는지 찾으려 합니다. 다들 좋지 못한 일이 닥쳤을 때,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그런가?”라고 생각해 본 경험들을 다 갖고 계시죠? 그 때 이런 내용이 설득력을 갖습니다. “네 조상의 죄 때문이다!” 이것은 주술이지 성경이 아닙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의문 한 가지를 마저 풂으로서 이 글을 끝내도록 합시다. 아마도 이 글을 읽고서도 독자들 중에서는 여전히 찜찜한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출애굽기 20장 5절과 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미워하는 자의 죄를 삼, 사대에까지 갚을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푼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언약적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니 이 문장을 “문자적”으로 읽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문자적으로 실현될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언약의 성격을 이해하면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이것을 저는 언약을 “언약적으로 이해하느냐, 기계적으로 이해하느냐의 문제”라고 표현합니다(재미있는 것은, 저 구절에서 “삼사대의 저주”는 문자적으로 받으면서, “천대까지의 축복”은 문자적으로 안 받는 다는 점입니다. 삼사대의 저주가 문자적이라면, 잘 믿는 자의 자손은 천대까지 거저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맘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 한 사람과 맺으시지 않고, 인류 전체와 혹은 그 가족들과 맺으십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내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지만” 인류 전체에 속한 나는 범죄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언약을 맺었을 때는 아담 개인과 맺으신 것이 아니라, 아담이 인류의 대표자로서 인류 전체와 언약을 맺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언약은 ‘계승’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언약을 맺을 때, 다시 처음부터 새롭게 언약을 맺지 않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과의 언약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이삭과의 언약은 “기존 언약의 갱신”이지 매 새로운 아들마다 새롭게 체결하는 언약이 아닙니다. 이 계승적 언약은 이삭의 아들 야곱에게도, 그의 아들 요셉과 그의 형제들에게서도 꾸준히 지속됩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은 “계승적”입니다(왕하13:23; 신29:13).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의 인물들이 다음과 같이 탄식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느1:6)
왜 자기가 범죄하지 않았는데 탄식합니까? 그것은 언약이란 하나님과 개인이 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공동체가 맺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었다면, 느헤미야 자신은 죄를 범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에 관하여 “공동의 책임”을 갖습니다. 자기도 그 언약그룹 안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사대에 걸친 저주”를 말씀하시거나, “천대에 미치는 축복”을 말씀하실 때는 이러한 “언약적 차원”에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기계적으로 미치는” 무조건적인 축복이나 저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언약하셨을 때는 그 언약이 전 세대에 걸쳐 미칩니다. 그러므로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언약을 맺었다면 우리는 모두 그 언약 안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 중 누군가가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면, 성경의 방식으로는 우리가 그 조상의 허리에 있어서 함께 언약을 배반한 것입니다(히7:10 참조).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은 그런 연유입니다. 우리의 조상 중 누군가가 하나님을 거역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향하여 화를 내십니다. 그 화를 내시는 것은 몇 대에 걸쳐서 계속 존속될 것입니다. 우리 조상 중 누군가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가문인 우리를 향하여 기쁨과 축복으로 대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것은 기계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범한 것으로 인해 노여워하시면서, “삼사대까지 저주가 미칠 것”을 말씀하셨다고 해도, 그것은 삼사대까지 기계적으로 미치는 저주가 아닙니다. 운명론적으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히키가 말한 것처럼 조상이 저주받을 짓을 했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테두리 안에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의 축복과 저주의 특징은 그것이 항상, “언약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언약적”이라는 말은 언제 어느 때이건 간에, “하나님께 순종할 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저주를 내리시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한번 앞에서 예를 든 아담의 언약의 예를 상기해 봅시다.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내리신 저주는 “전 인류에게 미치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내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저주 안에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내가 전혀 헤어 나올 수 없는, 멸망으로 가게 될 수 밖에 없는 그런 저주를 말합니까? 히키의 예처럼, 그의 자손들은 저절로, 자동적으로 비참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내용이 되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믿는 우리 역시 아담의 후손들이지만, 우리는 도리어 큰 축복 가운데 있습니다. 왜입니까? 아무 때에든지,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한다면 그 언약의 저주로부터 탈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사람의 살고 죽는 것은 그 사람이 “여전한 언약적 저주를 선택하느냐”, “언약적 저주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선택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지, 즉 “아비가 신포도를 먹느냐, 아들이 신포도를 먹느냐”에 달린 것이지, 아비가 신포도를 먹는다고 해서 아들이 이가 시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받을 때, 무조건적으로 임하는 불가항력적인 어떤 힘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삼, 사대에 이르는 저주”가 선언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거저 임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천대까지 이르는 축복” 가운데 내가 있다고 해서, 내가 잘 믿지 않아도 거저 은혜를 받을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언약의 복과 저주를 선언하시고 시행하시는 것이 맞지만, 항상 그것은 대상자인 “그 사람 자신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언약적 저주 하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더 이상 저주는 그에게 효력적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언약적 축복, 즉 부모와 조부모가 수대에 걸쳐 믿어온 가정에서 자랐다고 할지라도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다면, 더 이상 축복은 그에게 효력적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언약의 이러한 특성에 무지함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공포심만을 조장하는 무속적 저주가 되어 버렸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 언약의 축복과 저주를 읽을 때, 언약의 당사자인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깨닫고, 그 위치에서 하나님 앞에 최대한 신실하게 살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적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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