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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성_주님의 샬롬은 힘의 엄격한 균형이다?

하재성_주님의 샬롬은 힘의 엄격한 균형이다?
 
월간고신 8월호(2010년)에 실린 하재성 교수님의 글을 분석해 보고 있는 중입니다.
 
p28에서 하재성교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고침 받은 환자들의 그 큰 부담을 모르시겠는가?
분노 가운데 일어나셔서 "생명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항변하시고,
율법주의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율법주의에 상처 입은 영혼들을 진정한 평안 가운데 보내신다.
주님의 치유는 고침 받은 자의 마음의 쉼과 평안까지도 신학적으로 분명히 보장하시는 치유였다.
예수님의 뒤 끝은 오직 평안이었다.
주님의 샬롬은 막연하거나 모호하거나 몽롱한 평안이 아니다. 그것은 힘의 엄격한 균형이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정의(justice)란 곧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이라고 말했다.
개인과 개인에게는 사랑이 있어야 하지만
집단과 집단, 혹은 국가과 국가 사이에는 힘의 균형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역설하엿다.
참된 치유의 사역은 어린 아이들을 편드시면서 그들이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정의실현에서 비롯된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연약한 자들을 실족하게 하는 악한 권력에 대항하여 목회자는 강해져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을 향해 지나치게 높아진 제자들의 목소리와 권력을 낮추셨다.
동시에 낮아지고 겸손해진 가난한 이들과 약한 이들의 마음은 높이시고 세우셨다.
그것이 주님의 치료와 정의와 평안의 사역이었다.
주님의 치유의 메이야로서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는 강한 능력으로 "심판하여 이기"실 주님이시다(마 12:19-20)>
(월간고신 본문에는 "끄니 아니하시는" 이라고 오타가 나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우선 라인홀드 니버가 한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부터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리라고 본다.
라인홀드 니버는 기독교의 진리 일반에 대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먼지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창조를 신화적 개념으로 보았으며, 자연히 아담의 타락을 신화적 개념이라고 보았다.
그의 논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신화라고 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불합리하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라인홀드 니버는 예수님의 대리적 속죄는 신학적 오류라고 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속임수의 교리로 보고 몸의 부활도 부정하는 자리까지 간다.
 
라인홀드 니버의 신학적 성향을 보았으니,
그의 정의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퍼온 글을 한 번 읽어보자.
 
<니버는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였던 디트로이트에서의 목회활동을 통하여
산업사회를 이끌던 미국의 실상을 깨닫게 되었다.
자동차 회사의 연령 제한으로 한창 일할 나이에 퇴직을 당한 실업자들이나
낙담한 부품업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포드식 기업 경영의 어두운 그늘,
즉 컨베이어식 조립 라인, 장기적인 공장 폐쇄, 반복적인 대규모 해고, 노인 근로자의 해고,
노조적대정책 등 산업사회의 발전이라는양지 뒤에 숨어있던 비인간화라는 음지를 발견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그의 탁월한 사회윤리가 탄생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선한 개인이라 할지라도 악한 집단에서는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산업사회의 현실을 주목했고, 이를 바탕으로 그의 3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인간의 본성과 운명], [기독교윤리학]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니버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하여 인간과 사회가 이기주의라는 악에 깊이 물들어 있음을 말한 뒤에
개인의 도덕에는 ‘사랑’이라는 규범이 적용되지만 집단간의 도덕에는 ‘정의’의 규범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니버가 말한 정의는 힘의 균형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그는 자유주의 정치체제와 경제체제의 의의와 한계,
마르크스주의 정치체제와 경제체제의 의의와 그 위험성, 전쟁과 핵문제에 대한 기독교인의 바른 입장,
국제정치 질서를 위한 국제기구 형성의 한계, 기독교인과 교회가 갖추어야 할 사회적 지성과 실천 등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깊이 있고 폭넓은 탐구를 전개했다.
이와 같은 주제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깊은 논의가 필요한 핵심적인 주제들이다.>
(자료출처:http://blog.naver.com/joshua_jlee/50025350251)

정리해보자면,
주님의 샬롬은 힘의 엄격한 균형이다.
힘의 균형은 라인홀드 니버의 정의의 개념 곧 힘의 균형을 말한다.
참된 치유의 사역은 주님의 정의실현에서 비롯된다.
목회자는 강해져야 한다.
어린이들, 약한 자들, 겸손한 자들의 마음은 높이시고 세우셨다.
그것이 주님의 치료와 정의와 평안의 사역이었다.

라인홀드 니버가 미국경제의 불합리성을 변혁시키기 위해 주장한 이론,
곧 여기서 말하는 힘의 균형, 정의의 실현이
과연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사역인가?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은 힘의 균형을 발휘하기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가?
목회자더러 강해지라고 하면서,
연약한 자들을 실족하게 하는 악의 권력에 대항하라고 하는 그 속셈은 무엇인가?
니버가 말하듯이, 비폭력저항과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가?
그래서 그가 결국 현실주의적인 입장에서 폭력정당론적 입장을 취했는데,
그러면 목회자더러 치유를 위해서 현실에 뛰어들어서 폭력을 적극 사용하라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과연 예수님의 사역이 힘의 균형, 정의의 실현으로 말미암는 사역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소위 힘의 균형, 정의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볼 일인가?
주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찾아가신 것도 그런 측면에서인가?
만일 예수님께서 그런 의도로 사역을 행하셨다면,
로마의 불의한 권력에 대항하여 유월절에 십자가의 죽음으로 희생하실 필요 없이,
곧바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숨돌릴 틈도 없이 로마로 진격해 가는 것이
힘의 균형의 사역, 정의의 실현으로 오는 샬롬의 사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차원으로 사역을 행하지 않으셨다.
그랬기 때문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욕심과 맞지 않음을 발견했고,
결국은 죽음으로서 끝을 내었다.
힘의 균형의 측면, 정의의 실현의 차원에서 사역을 하셨더라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접대를 받고 환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환경과 조건을 변화시키러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러 오셨고, 그 일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
 
상담과 치유는 세상의 힘의 균형, 정의의 실현으로 오지 않는다.
경제와 정치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그렇다고 그 일에 방관자로 나서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이 주가 되어 버리면 교회는 설자리를 잃게 된다.
 
상담과 치유는 앞서 언급한 글에서도 보았듯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선포하는데서 온다.
그 일을 위하여 명하신 직분에 충성하는 것이 신자된 길이다. 

더불어 우리가 알아두어야할 것은
심리학과 통합구도로 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이든지 도움이 될만한 이론들을 다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재성 교수님도 예외는 아니다.
위와 같은 니버의 비기독교적 성향과 사상을 가감없이 수용한다.
그러기 때문에 통합구도로 가는 그 시작은
'좋은 것만 수용하자'라고 말하지만
나중에는 수용을 하자에서 점령을 당하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
 
왜 그렇게 되는가?
세상은 이미 뉴에지이의 물결이요,
교회는 이미 신비주의와 손을 잡은 기독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경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에 늘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요일 4:1)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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