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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 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 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사 29: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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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12-11 15:07
ㆍ추천: 0  ㆍ조회: 8      
자유, 생명력 없는 도덕적 신앙인_박영돈
글에 대한 논평은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구원과 성화 (1)/왜 교인들의 삶이 변하지 않는가
2005년 03월 16일 (수)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박영돈 교수 / 고신대학교

남포교회(박영선 목사) 설립 20주년 기념 학술 축제가 ‘구원 그 이후: 성화의 은혜’라는 주제로 지난 3월 7일 남포교회에서 열렸다. 박영선 목사의 ‘나의 목회에서 구원과 성화’를 비롯해서 Bryan Chapell 카버넌트신학교 총장, 김영재 교수, 김정우 교수, 변종길 교수, 박영실 교수, 이수영 목사, 오덕교 교수, 김병훈 교수, 박영돈 교수 등이 발제자로 참석했다. 이중 박영돈 교수의 ‘오늘의 구원과 성화’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1. 오늘날 교회의 문제
왜 교인들이 변하지 않는가?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는 교인들의 삶과 인격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이룬 양적 팽창에 비해 그 영적 성숙과 성화의 진전은 매우 저조하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많은 이들을 ‘구원’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그러기에 구원과 성화의 심각한 괴리현상을 극복해야 할 시급한 과제를 안고 있다.

1) 무율법주의적 혼란
왜 우리 교회 안에 이러한 ‘성화의 공백(sanctification gap)’이 야기되었는가? 우리는 그 원인을 우선적으로 우리 교회 안에 만연해 있는 잘못된 가르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축복과 은혜에만 초점을 맞춘 설교가 한국교회 안에 도덕적 해이를 불러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윤리적 실패는 은혜만을 전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은혜를 잘못 전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본 회퍼(Bonhoeffer)의 말로 표현하자면, 값진 은혜를 ‘값싼 은혜’로 잘못 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국교회에 무율법적인 혼란을 초래한 값싼 은혜의 복음은 어떤 것인가? 가장 보편적인 것은 아마도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여 구원은 칭의에만 근거하며 성화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는 견해일 것이다.

이런 가르침에 의하면 성화는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부수적인 것이며 기껏해야 천국에서의 상급과 관련될 뿐이다. 그래서 삶과 인격에 아무런 실제적인 변화가 없어도 칭의에 근거해서만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과도 거리가 멀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면서도 그 둘 사이의 긴밀한 연결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항상 함께 가는 것이며, 실제로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다만 논리적으로 구별될 뿐이다. 만약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지체없이 그리고 필연적으로 성화가 뒤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는 그와 동시에 거룩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게 하시지 않고는 그 누구도 의롭다 하지 않으신다” 이와 같이 칭의와 성화는 영원한 하나의 끈으로 엮어져 있다. 그러나 이 둘을 논리적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은 로마가톨릭과 같이 칭의와 성화를 혼합하여 칭의가 어느 정도 신자의 실제적인 거룩함(성화)에 근거한 것으로 보게 되면 구원의 확신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 구속의 사랑과 은혜의 성격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로마가톨릭의 오류에 대응해서는 칭의와 성화를 날카롭게 구별하는 동시에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무율법주의의 위협에 대비해서는 칭의와 성화의 연결성을 강조했다.

이 연결성이 무시될 때 칭의의 교리는 심각하게 왜곡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실제로 많은 교인들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죄 속의 삶을 은밀히 합리화하는 구실로 삼는다. “바르게 살지 못해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으니까, 죄를 지어도 또 용서받으니까”하는 안일한 생각 속에 죄를 심상히 여기고 신앙의 방종과 나태에 빠진다.

그리하여, 본회퍼가 개탄했듯이, “죄인을 의롭게 하는 교리가 죄를 정당화하는 교리로 되어 버렸다.” 이렇게 값싼 은혜의 복음으로 변질된 교리는 옛사람을 부인하고 성령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신자의 중대한 의무를 교묘히 회피하는 좋은 구실을 제공한다.

더불어 죄를 끊어버리지 않아도,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거짓 안위를 안겨준다. 가장 적은 대가를 지불하고 천국갈 수 있는 신앙의 최저 기준치를 설정해 주고 거기에 신자들을 안주하게 한다. 결국 믿음은 회개와 순종의 대용물이 되어 버리며, 그 내용과 의미가 텅비어버린 껍데기로 전락해 버린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오직 믿음(sola fide)의 교리는 칭의에 있어서 행함의 역할을 배제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벨카우어(B.C.Berkouwer)가 잘 지적했듯이, ‘오직’이라는 표현은 믿음만이 참된 선행의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육신적 행위를 밀어내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우리 안에 흘러들어 오게 하는 통로가 된다. 동시에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며 역사하는 채널이 된다(갈 3:2~ 5) 그러므로 오직 믿음만이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를 산출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직 믿음이란 말은 육신의 열심과 교만에서 비롯된 율법적 행위를 배격한다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믿음만이 성령의 은혜로 인한 참된 선행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자료출처 http://www.amennews.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3385




자유, 생명력 없는 도덕적 신앙인
오늘의 구원과 성화 (2) 박영돈 교수 / 고신대학교
2005년 03월 23일 (수) 00:00:00 교회와신앙 


새로운 율법주의
은혜와 축복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가르침이 한국교회 안에 윤리적인 나태와 방종을 조장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이제는 윤리를 강조하는 설교가 점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은혜에 치중한 설교가 무율법적 혼란을 초래한다면, 윤리적 설교는 다른 극단,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은혜를 “거룩함의 열매를 반드시 생산하는 은혜”로 제시하지 못한 메시지가 한국교회에 윤리적 문제를 야기했다면, 신자의 윤리적 책임을 가능케 하는 그리스도 안의 은혜의 풍성함을 밝혀주지 못하는 설교 또한 교회의 영성에 심각한 폐해를 끼친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에 많은 교인들은 도덕적으로 각색되어 복음의 핵심이 흐려진 율법적인 메시지에 짓눌려 그리스도 안의 자유와 생명력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꼭 한국교회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것은 현대교회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필립얀시(Philp Yancey)는 그의 베스트셀러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개신교 안에 만연해 있는 고질적인 병폐인 무율법주의적 혼란보다 율법주의가 더 교묘하고 무섭게 은혜를 위협하는 요소라는 것을 탁월한 대중적인 필치로 설득력 있게 밝혀주었다. 개신교의 생명력을 시들게 하는 것은 값싼 은혜가 빚어낸 무율법적 혼란만이 아니다. 최근 기독교 상담과 내적 치유를 다루는 저명한 학자들은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율법주의적 신앙의 덫에 걸려 신음하고 있는 것이 개신교의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는 “가톨릭교도들보다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 이러한 (도덕주의적, 행위주의적) 왜곡으로 억압당하는 사람의 비율이 더 크다”고 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주의와 선행의 종교가 신교의 핵심으로 재진입하였다. 그 변화는 너무나 교묘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감지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투르니에는 한 개신교 신자가 자신에게 들려준 의미심장한 말을 소개한다. “개신교는 은혜를 얻기 위해 엄청난 선행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 같지만 가톨릭은 신부에게 구하면 누구에게든지 이 은혜를 자유롭게 나눠주는 것 같습니다.”
<상한 마음의 치유>라는 저서로 잘 알려진 데이빗 씨맨즈도 이런 문제가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안고 있는 정서적 영적 갈등의 근원이라고 했다. 그는 신자들의 신앙이 시간이 가면서 서서히 은혜 중심에서 행위 중심으로 전환되어 간다고 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로 시작했다가 자기도 모르게 율법적 성향으로 치우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은혜는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무조건적인 것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갈라디아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하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바르게 행하는가에 달려있다는 생각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즉, 그들은 ‘하지만 이 시점부터는 하나님도 내가 적어도 어떤 수준의 삶을 수행해 내기를 기대하시는 것이 분명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우리 노력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얻어낼 수 있고 행위로 간격을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씨맨즈의 지적과 같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칭의에 있어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데는 별 문제가 없으나, 성화 과정에서 그 사랑과 은혜를 실제 의지하고 누리는 데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구원받는 데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믿지만, 구원 후 신앙생활에서는 자신의 경건의 노력과 열심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따내려는 고집스러운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평생 율법주의와 싸운 은혜의 투사 루터마져도 이 옛습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고백하였다. “나는 과거 20년 동안 은혜의 메시지를 전해왔고 그것을 나 자신이 스스로 믿어왔지만, 지금도 내가 무엇인가를 공헌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나님과 거래하기를 원할 뿐 아니라 나의 거룩한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를 교환하려는 구습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전적 은혜만을 전폭적으로 의지해야 한다고 믿기가 여전히 힘들다”

개신교 신자들은 이론적으로는 철저히 은혜주의자임을 자처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율법주의자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 그것은 그들 머리 속의 지식보다 그들 안에 깊숙이 잠재해 있는 율법주의적 성향과 욕구가 은밀히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계속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감에 쫓기며 강박적으로 경건의 노력을 계속한다. 그러나 그런 신앙생활 속에 평안과 기쁨을 누림보다 오히려 가시지 않는 죄책감과 좌절감으로 시달린다. 그들은 모두 죄책에서의 자유함을 선언하는 칭의 교리를 신봉하면서도 실제 삶 속에서는 병적 죄책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투루니에의 말과 같이 “일반적으로 그들은 이론적, 교리적 차원에서 죄사함을 믿고 있지만, 그것을 그들의 내면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죄와 연결시키지는 못한다.”

개신교 강단에서 전파되는 성화론이 이런 문제에 대응하는 적절한 처방책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태를 더 심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믿음과 행함, 은혜와 윤리를 적절하게 연결시키지 못한 엉성한 성화의 메시지가 신자 안의 율법적 성향을 자극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대한 불감증을 심화시킨다.

종교개혁 덕분으로 개신교 신자들은 칭의에 있어서는 율법주의의 억압에서 해방되었으나, 성화의 과정에서 새로운 율법주의의 족쇄에 매여 신음하게 된 것 같다.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문제에 있어서 자신 안의 율법주의적 성향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을 갖춘 자가 되기 위해 그는 끊임없는 고행과 금욕으로 자신을 채찍질했지만, 그럴수록 자신 안에 번민과 두려움과 좌절만이 깊어가는 영적 쓰라림을 맛보았다. 그러던 중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려는 헛된 수고에서 벗어났다. 루터의 후예들은 루터가 대신 치른 영적 홍역 덕분에 그 곤욕을 되풀이하지 않고 무사히 칭의의 관문을 통과하는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안에 율법주의의 망혼이 이제 성화의 과정에서 다시 살아나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종교개혁이 칭의의 복음을 밝혀준 공헌을 남겼다면, 지금 우리는 거룩하게 하는 은혜를 거스르는 신율법주의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성화의 복음을 분명히 제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자료출처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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