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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교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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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rptbook 안내
작성일 2016-02-27 14:59
분 류 80
ㆍ추천: 0  ㆍ조회: 24      
칼라너_세계의 모든 것, 모든 곳이 신적 체험의 매개가 되고, 그 체험을 중개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있지만,
로마 가톨릭 신학자인,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의 삼위일체 공식은 매우 유명합니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다."

한편 당연해 보이고 멋있어 보이는 말이지만 매우 위험한 말입니다. 
이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다음 글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칼 라너Karl Rahner(1904~1984)의 신학과 영성 /이 찬 수

1904 3월 독일 프라이부르크의 중류층 그리스도인 집안에서 태어나다
1922 예수회에 입회한 후, 같은 예수회 신부 조셉 마레샬의 사상에 영향을 받다
1932 사제로 서품되다
1934 프라이부르크 대학 호네커 교수의 문하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사상적으로는 같은 대학의 마르틴 하이데거 사유 체계에서 영향을 더 받다
1948 인스부르크 대학 교수로 취임하다
1962-65 제2차 바티칸공의회 신학자문위원으로 참여해 현대사회 안에 처한 교회의 자세 및 타종교 안에서도 그리스도성을 보는 신학적 기초를 제공하다
1984 3월 타계할 때까지 《세계 안의 영1939》 《말씀을 듣는 이1941》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1976》 《신학연구집1954-1984 전16권》을 포함하여, 단행본, 논문, 논평문 등 4,000편이 넘는 저술을 남기다

일상의 신비
그리스도인은 흔히 하느님이 초월적인 분이라고 고백한다. 하느님은 우리의 일상적 세계, 유한한 그 무엇에 의해 포괄되지 않고 규정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더 크시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우리의 일상을 넘어 그 ‘밖’에 계시는 셈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일상 ‘밖’에 계시기만 하다면 어찌 일상 안에 갇혀 사는 인간이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겠으며, 하느님을 신앙한다 고백할 수 있겠는가? 
20세기 최대의 신학자랄 수 있는 칼 라너Karl Rahner는 언제나 이러한 물음을 중시하며 신학을 한다. 그의 신학적 표현들은 결코 쉽지 않지만, 전체적인 요지는 분명하다. 여러 각도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일상 밖에 계시면서 동시에 안에도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말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일상 밖의 하느님이 일상 안의 인간에 의해 인식되고 고백된다는 것이다. ‘밖’에 계신다고 말할 수 있는 곳이 ‘안’이라는 말이다. ‘밖’에 계신 하느님이 동시에 ‘안’과 철저하게 관계를 맺고 계시고 이미 일상 안에 계심으로써, 일상적인 체험을 그저 일상적인 체험으로 머물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은 이미 일상 안에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하느님 자신이 구체적 일상사 안에 현존해 있고 그 일상사를 통해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라너에 의하면, 일상사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수단이 될 뿐 아니라, 일상 자체가 원천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미 신적으로 고양되고 승화되어 있다. 심지어는 의식적으로 하느님을 거부할 때조차도, 하느님과 상관없는 듯한 세속적인 일에 종사하고 있을 때조차도 하느님 체험은 일상적 삶 안에 이미 들어와 있고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에 의하면, 일상의 모든 사건이나 사물은 인간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해주는 매개가 된다. 교회에 나가서 명시적으로 하느님을 말하고 예배하는 종교적 영역에서만 하느님 체험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에 의하면 하느님 체험은 “‘모든 범주적 현실들을 통해 중개된다.” 세계의 모든 것, 모든 곳이 신적 체험의 매개가 되고, 그 체험을 중개한다는 것이다. 
매개하고 중개한다지만, 하느님 체험이 간접적으로만 이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하느님은 세계의 모든 것을 통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 현존하신다. 이 현존은 하느님의 직접적인 도래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하느님 체험의 선험적 근거와 지평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미 이러한 지평 위에 서 있다. 이 지평 위에 있으면서 그 지평을 향하는 셈이다. 이 지평 위에 있기에 사실상 그 지평을 체험하고 있으며 이미 그 지평에 도달해 있다. 출발점이 곧 도착점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매개성과 직접성은 상반 개념이 아니라고 그는 본다. 그 매개를 통해서만 원천적이고 선험적인 지평으로서의 신적 현존이 구체적 일상사 안에 드러나고, 직접 관계를 맺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라너가 말하는 하느님 체험은 비일상적인 황홀경의 체험이 아니라 바로 일상의 ‘신비’에 대한 체험이 된다. 일상의 신비란 일상이 일상 자체에 머물지 않으면서 동시에 일상 그대로를 떠나지 않는다는, 일종의 역설을 말한다. 일상 자체가 하느님에 의해 이미 신적으로 고양되어 있으므로, ‘높은’하느님 체험이‘낮은’일상 안에 현존하면서 일상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너무 뜻밖이면서 너무 자명한 진리, 그 무엇에도 갇히지 않는 무한한 하느님이 유한한 일상 안에서 알려지는 진리, 그래서 신비이다. 이런 신비가 일상 안에, 있는 그대로의 인간 안에 생생하게 부여되어 있으니, 이미 주어져 있는 일상에서의 자아 체험은 원천적으로 하느님 체험이 아닐 수 없다. 누구라도 이 지평을 떠나서는 살지 못한다. 인간이 인간되는 소이가 바로 하느님의 자기 내어주심, 이미 주어져 있는 신적 현실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구체적 하느님 체험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구체적인 모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라너는 진지하게 일상사를 살아가는 곳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체험의 실제적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하느님 체험은) 우리의 영적 기능들의 ‘모든’ 운동 안에 알려지지 않고 표현되지 않은 채 현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개별적 사건들과 일상사의 과제들 속에 묻혀있는 개별적인 것이 자기 자신의 문제가 되고 습관적으로 회피하고 있는 자기 삶의 요소들이 더 이상은 간과할 수 없는 형편에 놓이게 되는, 그러한 일상사들 안에서…그것은 더욱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래서 인간이 갑자기 ‘외로움’의 상태에 빠질 때, 모든 개별적인 일들이 말하자면 이 안에서 희미해지고 침묵하고 사라져버림 속으로 잊혀져 갈 때, 흔히 말하듯이 모든 것이 의문에 처해질 때, 침묵이 일상적인 소음보다 더 깊게 관통해서 울릴 때가 바로 이때이다. 그렇게 인간이 갑자기 자신의 자유와 ‘책임’에 불가피하게 직면하게 되는 체험을 할 때가 이때인 것이다.

이 글은 하느님 체험이 세상만사 안에 이미 현존하고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채로, 무한한 실재가 일상사의 습관적인 소음 안에 가려져 있고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인간은 자신에게 친밀하게 다가오는 무한의 실재를 더 이상은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때가 온다. 라너는 이것을 일상적인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져 침묵으로 일관할 수 밖에 없게 될 때, 자신이 외로움에 빠지고, 결국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느끼게 되는 때라고 설명한다. 바로 이 때가 숨어있던 하느님 체험이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때이다. 침묵하던 실재가 일상의 소음을 뚫고 울려 퍼지는 것이다. 

이때는 일상을 그저 일상으로만 알지 않고, 하느님에 의해 신적으로 들어올려져 있는 일상을 보게 된다. 물론 숨어있던 실재가 자신을 드러낸다지만, 인간의 본성과 자유를 무시하고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일상사에서 하느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자유롭고 책임 있는 행위로 실재의 숨은 깊이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참으로 인간다운 삶이란 더없이 진지한 자유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포착되는 영원한 하느님의 무게를 지닌 삶이다.”

이러한 사람은 스스로의 자유를 누리되, 하느님 안에서 누린다. 그는 자신의 실존이 자신의 실존이면서도 불가해한 신비에 근거 지어진 삶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 안에 살면서도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일상사에 파묻히지 않는다. 도리어 그런 식의 일상사가 거부되는 그곳에서 참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그럼으로써 자기 삶의 진정성을 획득해나간다. 그렇게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자세, 그 수도자적인 모습을 라너는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는 자기를 변명하고 싶은데도, 부당한 취급을 받았는데도 침묵을 지킨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남들은 오히려 나의 침묵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도 남을 용서해준 적이 있는가. 우리는…하느님과 그 뜻이라고 부르는 저 신비롭고 소리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분 때문에 순명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감사도 인정도 받지 못하면서, 내적인 만족마저 못 느끼면서도 희생을 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순전히 양심의 내적인 명령에 따라 아무에게도 말못할, 아무에게도 이해 못시킬 결단을…자신이 영영 책임져야 할 결단일 줄 알면서 내린 적이 있는가…하느님을 사랑하면 죽을 것만 같은데도 하느님을 사랑한 적이 있는가. 하느님 사랑이 죽음 같고 절대적 부정 같아 보일 때…그래도 하느님을 사랑한 적이 있는가. 의무를 행하면 자기 자신을 참으로 거역하고 말살한다는 안타까움을 어찌할 수 없는데도…의무를 행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감사도 이해도 메아리치지 않는데…누구에게 친절을 베푼 적이 있는가…그와 같은 일이 내게 있었다면 영을 체험한 것이다.

영을 체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영원의 체험이다. 영은 이 시간적 세계의 일부 이상이라는 경험, 인간의 의의란 이 세상의 의의나 행복으로 다할 수 없다는 경험, 현세적 성공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아무 근거도 없이 그저 믿고 뛰어드는 모험의 경험이다.” 이 영의 맛을 체득한 사람, 이런 경험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사람, 이들이 바로 성인聖人이다. “성인들은 영을 그대로 들이마신다…그래서 그들의 별난 인생, 가난, 겸손의 갈망, 죽음의 그리움, 고통의 감내, 순교의 은밀한 동경이 있는 것이다.” 

결국 “영으로서의 인간이란 단지 사변적으로 뿐 아니라 실존적으로 신과 세계, 시간과 영원의 접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영의 체험이란 영원의 체험이고 신적인 삶의 체험이다. 현실 안에 있으면서 현실을 넘어서는 실존적 초월의 체험이다. “우리가 이처럼 영을 체험한다면 적어도 믿음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사실상 이미 ‘초자연적인 것’을 경험한 것이다.” 이런 체험이 용서하고 순명하고 희생하고 사랑하면서 고독한 ‘결단’을 내리는 일상의 행위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나를 부정하고 너를 담아내는 행위이며, 그 안에서 하느님 체험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느님 체험이 구체화되는 장소가 이웃과의 관계, 인간간의 관계인 셈이다. 결코 이기적 개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개인이 개인으로 살아가는 데는 다른 개인이 전제된다. 너 없는 나란 없다. 이러한 삶을 충실히 살아낼 때, 자기 중심에서 타자 중심으로 방향을 바꿀 때, 일상 안에 숨겨있던 하느님의 사랑이 구체화되는 것이다. 
라너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이 자신을 내어주고 비워 자신이고자 하지 않을 때 그는 인간이 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육화 아닌가? 마찬가지로 이웃과의 만남에서 자기를 내어주는 자기 비움의 체험이야말로 신적 자기 전달, 즉 은총의 구체화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이 구체화되는 곳에서 인간의 본래적인 성품도 완성되는 것이다. 라너 영성신학의 핵심은 이런 식으로 일상의 본질을 꿰뚫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라너에 관한 우리말 소개글> 
심상태, 《익명의 그리스도인: 칼 라너 학설의 비판적 연구》, 성바오로출판사, 1989.
이찬수, 《인간은 신의 암호: 칼 라너의 신학과 다원적 종교의 세계>, 분도출판사, 1999.
《칼 라너: 그는 누구였나》(마이놀트 크라우스와의 대담), 정한교 옮김, 분도출판사, 1985.

이찬수 / 서강대 화학과를 거쳐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강남대 교양학부 교수로 있다. 저서로 《인간은 신의 암호》《종교신학의 이해》《한국종교문화연구 100년》(공저) 등이 있다.

영적 자유를 위한 기도 ; 칼 라너 신부

                                             - 류 해욱 신부 옮김

오, 하느님, 영이신 당신!
당신께 청하오니 
저희의 모든 행동이 
당신의 영감을 따라 이루어지게 하시고 
당신의 은혜로운 손길을 거쳐 순화되게 하소서
하여 저희의 모든 기도와 일이 
항상 당신으로부터 시작하여 
당신을 통해 마치게 하소서
하느님, 저의 하느님, 
저는 오로지 사랑 안에서만 
당신을 찾을 수 있나이다.
사랑 안에서 
오로지 사랑 안에서 
저의 영혼의 문이 열리어 
제가 자유의 맑은 공기를 숨쉬게 하시고 
저의 작은 자아일랑 잊게 하소서
사랑 안에서 
저의 좁고 초조한 소견의 우물에서 벗어나 
강물로 흐르게 하소서 
하여 저를 가난과 비움의 수인이 되게 하소서.
사랑 안에서 
저의 영혼의 모든 힘이 당신을 향해 흘러 
다시 제게 돌아오지 않게 하소서 
하여 당신 안에 온전히 잠기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당신은 제 마음의 과녁인 까닭에 
제 자신보다 오히려 제게 더 가까이 계시나이다.
제가 당신을 사랑할 때, 
제가 저의 자아의 좁은 동그라미를 깨고 
답변 없는 물음들의 고통을 남겨놓으려 할 때, 
저의 눈먼 눈이 
아스라이 멀리로부터 보려고 하지 않을 때, 
당신의 다가갈 수 없는 
눈부심으로 하여 눈을 감으려 할 때,
오 헤아릴 수 없는 이여, 
사랑의 문을 통과하여 
당신이 제 생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오셨을 때 
그제야 저는 
당신 안에 저를 온전히 묻을 수 있나이다.
오 신비로우신 하느님 
그제야 저의 모든 물음들을 
저와 더불어 당신께 묻을 수 있나이다.
(자료출처 http://tip.daum.net/question/59082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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