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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2-30 08:40
분 류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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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의 역사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의 역사
기사입력 2015-12-17 오후 9:05:00 | 최종수정 2015-12-17 오후 9:05:59  


이윤호 (선교지평 발행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563년 신성로마제국의 도시 하이델베르크에서 작성되었다. 이것이 만들어진 배경을 이해하기위해 우선 신성로마제국이 어떤 나라였고 하이델베르크는 어떤 도시였는지 살펴보자.

• 신성로마제국, 선제후(選帝侯), 그리고 라인궁중백작

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자 로마는 동로마제국으로 축소된다. 서유럽에서는 여러 게르만민족들이 땅과 권력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고, 물론 황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몇 백 년이 지나서 서유럽에 다시 황제가 나타난다. 교황 레오3세가 프랑크왕국의 왕 샤를마뉴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준 때이다. 800년의 일이다. 정치적 지지기반이 약했던 교황이 현실적인 보호자를 얻기 위해 이것을 기획했고 프랑크왕국의 왕은 교회를 등에 업고 자신의 야심을 실현시키리라는 기대로 황제의 관을 받았다.

그렇지만 샤를마뉴가 죽자 왕국의 기틀이 송두리째 기울었다. 그가 세워 놓았던 황제의 위상도 땅에 떨어졌다. 혼란을 거듭하는 사이 샤를마뉴 시절에 전성기를 맞았던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는 단절된다. 나라가 분열되고 분열된 나라들 사이의 국경이 여러 번 바뀐 후에 독일,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의 형세가 잡혀나갔다. 그러던 중 교황은 또 한 차례 세속 왕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독일 작센 가문의 오토 1세가 그 대상이었다. 962년에 새로 성립된 황제의 나라는 1806년까지 지속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독일로 불리는 땅을 중심으로 한 이 나라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황제의 나라는 한 동안 이름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제국은 이탈리아로 원정을 감행하면서 옛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로마제국이라는 이름을, 그리고 교회와 경쟁하면서 교회 뿐 아니라 세속국가도 신이 정하신 거룩한 나라임을 드러내는 신성제국이라는 이름을 착안해 내었으며, 나중에 이 둘을 합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나라는 고대 로마제국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으니 황제의 관심은 독일 땅이라는 한정된 영토에 머물 리 없었다. 황제들이 우선적으로 눈을 향한 곳은 이탈리아였다. 옛 로마제국의 상징과도 같은 영토가 아닌가! 이 땅을 얻기 위해 황제의 군대는 수없이 알프스산맥을 넘었다. 원정이란 재정이 확보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잦은 대규모 원정이 나라를 멸망으로 내모는 경우도 흔하다. 그렇다면 황제는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어떻게 충당할 수 있었을까? 원정은 귀족들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그렇지만 귀족들의 지원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절대왕권이니 민족주의니 해서 통치자가 각 개인의 자원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한참 후에야 있을 법했고 당시 정치구조와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즉, 황제가 귀족에게 무엇을 받았으면 다른 무엇으로 보상해야 했다. 황제가 줄 수 있고 귀족들이 흔쾌히 받을 만한 것은 다름 아닌 권력이었다. 황제란 서유럽에서 단 한명 뿐인 위엄 있는 존재였지만 정작 자기 나라 안에서는 힘 있는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처신이 불편한 역설적인 인물이었다.

귀족들의 힘이 제대로 드러난 사건이 14세기 중반에 일어났다. 135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4세는 나중에 금인칙서라 불리게 되는 공문서를 인장으로 승인했다. 그 인장이 금으로 되어 있어서 금인칙서(金印勅書)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 칙서에는 제후들, 특히 선제후들의 권리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여기서 선제후(選帝侯)란 무엇일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선출에 의해 정해진다. 누가 황제를 선출할까? 바로 황제를 선출할 권리를 가진 제후가 선제후이다. 처음에는 선제후가 40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숫자가 점점 줄어 7명으로 되었다. 금인칙서가 공포되었을 때도,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도 선제후는 7명이었다. 그렇다면 4명의 세속 제후들과 3명의 성직자 제후들로 이루어진 선제후 집단이 제국 내에서 발휘했던 영향력은 엄청났을 것이다.

금인칙서에서는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쾰른 대주교, 라인 궁중백작,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작, 보헤미아 왕을 7선제후로 확정했다. 이 칙서에서는 선제후들에게 자신들의 영토에서는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을 굵직한 권리들을 보장했다. 재판권, 광산 채굴권, 관세 징수권, 화폐 주조권 같은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장자에게 영지를 상속할 수 있었고 호출에 응하지 않을 권리와 소환되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선제후에 대한 반란은 대역죄로 처벌되었다. 선제후들이 얻어 낸 권리는 점차 다른 제후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선제후들의 명칭 중에서 우리 귀에 낮선 단어들이 있다. 변경백작과 궁중백작이다. 변경백작은 제국의 변방에 위치한 영지를 다스렸는데, 이 땅은 다른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군사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원래 변경백작은 다른 백작들 보다 더 강한 세력을 형성했다.

궁중백작은 원래 황제의 최측근들이었다. 신성로마제국 초기에 황제는 지방의 권력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궁중백작을 곳곳으로 보내 일정 영토를 다스리게 했다. 황제는 그곳을 순회하며 지방 세력을 적절히 통제했다. 황제와 매우 가까이 있었다는 이유로 궁중백작은 다른 백작들에 비해 높은 지휘를 가졌다. 처음에는 궁중백작이 다스리는 땅, 즉 궁중백작 령(領)이 여러 곳 있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주위의 토착세력에 의해 쇠퇴해 사라지고 라인 강 상류에 위치한 궁중백작 령만 그곳에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궁중백작은 독일어로 팔츠그라프(Pfalzgraf)이다. 그래서 라인 강 유역의 궁정백작 령을 팔츠라 부르게 되었다. 즉, 처음에 팔츠는 여러 명의 궁중백작이나 궁중백작 령을 호칭하는데 사용되었지만 궁중백작 령이 하나만 남게 되는 바람에 라인 강 유역에 위치한 특정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게 되었다. 이곳 팔츠의 통치자는 일곱 명의 선제후들 중 한 명이었고 이곳의 중심도시가 바로 하이델베르크였다.

•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이 도시에서 1563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작성되었다. 이 요리문답은 당시 48세이던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강한 의지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제후들 중 한명이었던 그가 이 일에 작심하고 뛰어들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프리드리히 3세가 팔츠의 통치자가 된 것은 1559년이다. 그로부터 몇 해 전 제국에서는 종교와 관련된 중요한 발표가 있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렸던 종교화의(宗敎和議)를 통해서였다. 제국 내에서 신교(新敎)를 믿을 자유가 선포되었다. 물론 제약은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신교는 루터파에 한정되고 종교 선택권은 제후에게 있었다. 제후의 힘이 유별나게 강했던 신성로마제국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프리드리히 3세 바로 앞의 팔츠 선제후였던 오토 하인리히는 1555년 종교화의에 힘입어 그의 영지에서 건실한 루터파 교회를 세우는데 매진했다. 프리드리히 3세도 루터파 신자였다. 그는 같은 신교(新敎)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중요한 신학적 문제로 교회 지도자들이 서로 대립하는 현실을 직시했다. 그는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어떤 가르침이 성경에 합당한 것인지 찾아 나섰다. 그는 칼뱅주의가 가장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속에 확신을 얻은 이상 하인리히 3세는 자신이 통치하는 백성들을 그냥 시대적 조류에 맡겨둘 수 없었다. 그곳에 칼뱅주의 교회가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는 열정이 그를 사로잡았다. 유럽 각지로부터 바른 신앙을 가르칠 수 있는 목회자와 교수를 초빙했다. 그리고 그는 교회를 위해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발견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1555년 종교화의 이후 많은 사람들이 신교(新敎)로 개종했다. 물론 개인의 자발적인 의지가 아니라 자신들이 속한 제후의 결정으로 일어난 일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신교(新敎)가 지니고 있는 정신을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한 사람들이 신교(新敎) 집단 안에 수두룩했을 것이다. 신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신교신자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오늘도 마찬가지이지만. 팔츠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게다가 프리드리히 3세 선제후가 백성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그저 막연한 신교(新敎) 신앙이 아니라 칼뱅주의에 기초를 둔 역동적인 힘을 지닌 신앙이다. 그런 신앙을 제대로 가르칠 방법이 없을까? 선제후는 요리문답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신앙의 내용들이 제대로 정리된 문답서가 있어서 교회들이 이것으로 성도들을 교육한다면 그들 가운데 바른 개혁신앙이 확고하게 뿌리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이렇게 되려면 요리문답은 무조건 잘 만들어진 것이어야 한다. 의욕이 앞선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무작정 기다린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이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을 신중하게 찾았다.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와 카스파 올레비아누스 같은 사람들이었다.

• 값진 신앙의 유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만들어졌던 16세기 중반의 보통 사람들 틈에 한 번 서 보자. 그때 사람들의 대화에서 빠지지 않는 화젯거리가 있었다. 바로 역사상 최대의 이슬람제국이었던 오스만제국의 위협이다. 두려움과 우려가 섞인 말투였을 것이다. 그때로부터 100여 년 전, 화려한 기독교문화를 꽃피웠던 도시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제국에 의해 함락되어 동로마제국이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 충격이 사람들의 머리에서 쉽게 사라졌을 리 없다. 오스만제국은 동로마제국을 정복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유럽의 중심부를 향해 진격을 늦추지 않았다. 종교개혁이 한창일 때 오스만제국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요충지 비엔나 함락을 꿈꾸던 술탄 술래이만(1520~1566 재위)의 야심은 유럽인들을 오싹하게 했다. 침략의 최종목표가 기독교세계 전체라는 사실을 누구나 눈치 챈듯했다.

사람들 틈에서는 어떤 건축물에 대한 이야기들도 흘러나왔을 것이다. 이번에는 왠지 가슴 뿌듯한 말투였지 싶다. 오스만제국이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을 때, 그 도시의, 아니 동방기독교 세계의 상징적 존재였던 성소피아성당을 무너뜨리는 대신 그것을 모스크로 바꾸어 사용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서로 등을 돌린 지 이미 오래였지만 이로 인한 충격은 동방이나 서방이나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이 일로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었다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그 영광을 되찾으려는 노력에서였을까, 언제부턴가 로마교회는 성 베드로성당을 재건축하는 데 갑절의 정성을 들였다. 미켈란젤로의 감각이 돋보이는 성 베드로성당은 세계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칭송받을 만한 모습으로 다듬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교회의 본질을 망각한 채 이런 노력이 하나님에 대한 본분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성 베드로성당은 로마교회의 축소판이 아니었을까? 옛날 파라오가 피라미드를 세울 수 있었을 만한 권세와, 미켈란젤로의 작품들만큼이나 정교한 신학을 교회는 뽐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교회가 선포하는 말씀이 오히려 진리를 덮고 있었고, 성도들의 온 몸을 내던지는 헌신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망가뜨리고 있었다.

교회의 참 모습을 되찾으려는 목숨을 건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개혁은 쉽지 않았다. 오랫동안 흘러내려 오던 물결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많은 물줄기들 중에 올바른 것을 제대로 찾아 거기에 합류시켜야했다. 개혁가들은 부패한 교회가 내려치는 거센 핍박을 이겨내야 했을 뿐 아니라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불거지는 신학적 혼란 속에서 합당한 신앙의 기준을 정립해 나가야 했다. 개혁가들은 고난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개혁운동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한 운동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 가운데 팔츠의 선제후가 다스리는 영토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통해 말씀이 설교되고 가르쳐졌으며, 이런 풍경이 점점 확장되었다.

16세기 중반을 회고하는 사람들 중에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던 오스만제국의 위용에 매료되어버린 자들이 많다. 성 베드로성당의 웅장함과 섬세함에 감격하며 그것이 있게 한 사람을 칭송하는 자들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오스만제국의 힘찬 도약보다, 성 베드로성당의 아름다운 자태보다, 훨씬 소중하고 값진 유산을 우리가 지니고 있으니 바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다. 전쟁에서 제국을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용맹한 오스만 전사보다, 성 베드로성당의 아름다움을 위해 불구의 몸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예술가들보다, 올바른 신앙의 보존과 상속을 위해 고심했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작성자들에게서 우리는 가치 있는 전투적 정신을 배운다. 비록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카스파 올레비아누스 같은 이름들이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너무나 생소하지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교회가 분별력을 잃어버렸던 시대에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그것이 교회가운데 살아나도록 하려는 개혁가들의 전투적 노력이 깃든 산물이기 때문이다.

모든 교회는 시대적 사명을 지니고 있다. 우리시대의 교회에게 맡겨진 사명은 무엇일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역사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가 크다. 개신교(改新敎)의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한 개신교인들이 지금도 많기 때문이다. 장로교도 마찬가지고 개혁주의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개혁을 위한 노력이 오히려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선교지를 한 번 생각해보자. 그곳에서 이 요리문답은 틀림없이 유용할 것이다. 새로 믿게 된 신자는 성경의 내용 하나하나를 알아야 한다. 그것과 함께 성경전체를 통해 요약될 수 있는 복음의 요체를 또한 알아야 한다. 그것이 성경을 바로 읽을 수 있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그 요체를 요리문답을 통해 익힐 수 있다. 그리고 선교사는 다양한 상황에 직면한다. 그것을 염두에 둔 채 가르치고 설교할 것이다. 이러할 때 요리문답은 선교사의 가르침이 다양성에 의해 중심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 준다.

* 위 글은 ‘선교지평’ 25호에 실린 글인데 허락을 받아 개제합니다.

(자료출처 http://reformednews.net/news/view.asp?idx=1259&msection=5&ssection=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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